제1장
아버님의 수레
193년 가을 ~ 194년 봄 · 효라는 이름으로 길이 열린다
193년 가을, 서주 땅을 지나던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당했다. 정확히 누가 왜 시켰는지는 사서마다 말이 갈린다. 하지만 군영의 병사들은 이미 그 일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린 병사, 그 이름을 허락해야 하는 사람, 그 이름 때문에 부름을 받은 사람, 셋의 겨울에서 시작한다.
I · 보리떡
견성 서쪽 병영의 아침은 죽 냄새로 시작됐다. 진구는 오(伍) 다섯 사람 몫을 뜨려고 국자를 쥐었다가, 솥 바닥에 눌어붙은 좁쌀부터 눈으로 쟀다. 일곱 홉이었다. 어제보다 한 홉이 모자랐다. 누가 삽으로 솥을 긁었다는 얘기였다.
덕만“오장님, 들었소? 서주 쪽에서 큰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거.”
진구“밥부터 먹어. 식는다.”
덕만“아니 들어 보시라니까. 주공 아버님이오. 수레가 열 대 넘게 가는데, 도겸 밑에 장개란 도위가 재물에 눈이 뒤집혀서…”
진구는 대꾸 대신 손가락 마디를 하나 꺾었다. 딱 소리가 났다. 덕만이 말을 멈추고 눈치를 봤지만 진구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뜨기 전에 숟가락을 두 번 세워 상을 톡톡 쳤다. 어머니가 하던 버릇이 그대로 옮아 온 것이었다.
막쇠“재물 때문이 아니란 말도 있수다. 도겸이 시킨 거라고.”
덕만“그러니 가서 갚아야지. 다들 대효도(大孝屠)라 하던데, 우리 주공이 효자시라서. 큰 효도 한번 하러 가자 그 소리요.”
그 말에 몇이 웃었다. 진구는 웃지 않았다. 도(屠) 자는 어디서 본 글자 같았는데, 한참 만에야 푸줏간 기둥에 붙은 것이었다고 떠올렸다. 고기 잡는 집 앞에 걸린 글자였다.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 문지기가 진구를 불렀다. 문 밖에 노파가 와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목책 밖 길가에서 보퉁이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동군 집에서 이십 리를 걸어왔을 사람이 숨도 고르지 않고 서 있었다.
어머니“밥은 먹었냐.”
진구“먹었습니다. 어머니, 여기 오시면 안 돼요. 병영에 아낙이 들어오면…”
어머니“안 들어간다. 여기서 준다. 보리떡 쪘다. 너 혼자 먹지 말고 네 오 사람이랑 나눠 먹어라.”
보퉁이를 받으니 아직 따뜻했다. 어머니는 아들 얼굴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소매로 진구의 턱을 한 번 닦았다. 죽 국물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주공 아버님 일은 들었다. 안됐지. 근데 진구야, 그 도겸 어른이 사람을 시켜서 그랬단 말이 맞냐?”
진구“저는 모릅니다. 위에서 하는 일이라서요.”
어머니“내가 팽성 사람이잖니. 그 어른 욕하는 사람은 못 봤다. 흉년 들면 곡식 푸는 어른이라고들 했어. 시킬 사람이 아니라던데.”
진구“…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모르지, 너는 늘 모르지. 대답 미루는 건 네 아버지를 닮았다. 서주로 가는 거냐?”
진구는 보퉁이 끈을 만지작거렸다. 군령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내려오지 않은 일을 말하는 건 거짓말도 참말도 아니었다.
진구“견성에서 보급 지키는 일입니다.”
어머니“그래, 그러면 됐다. 신 다 닳았더라. 삼아 놨으니 사흘 뒤 새벽에 가져오마. 그때 보자.”
어머니는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길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등이 예전보다 굽어 있었고 걸음은 올 때보다 느렸다. 진구는 문 기둥에 기대서 그 모습이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보리떡은 열 개였다. 오 사람이 둘씩 먹으면 딱 맞았다. 어머니는 이런 셈을 틀린 적이 없었다.
II · 사흘 뒤 새벽
저녁 어스름에 백부장이 오장들을 불러 모았다. 횃불 아래 마당에 모인 열두 명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백부장이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백부장“사흘 뒤 새벽에 출정한다. 서주다. 오장은 오 사람 점고하고 짚신 새로 갈아 신겨라. 군령은 내일모레 따로 내려온다.”
덕만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서주면 팽성이 코앞이었다. 진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사촌, 그러니까 외사촌 전보 형네는 팽성 동문 안쪽에 산다. 식구가 여덟, 입이 여덟이면 하루 두 되. 보리가 올해 열두 섬쯤 났다고 했던가.
막사에 누워서도 그 셈이 멈추지 않았다. 열두 섬을 여덟이 먹으면 일 년 가고도 남았다. 그 여덟이 어디에 있을지는 셈에 들어가지 않았다. 진구는 그걸 깨닫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옆자리에서 막쇠가 코를 골았다. 진구는 입속으로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를 굴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사수 물가에 솥을 걸자 오는 손님 먼저 먹이자. 노래는 그 두 줄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그걸 밥 짓는 내내 되풀이했다. 그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소리가 새지 않게 이를 물었다.
팽성에서는 모두 아는 노래라고 했다. 어머니는 빨래할 때도, 아이 재울 때도 그 두 줄을 불렀다. 뒷소절은 어머니도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그래서 진구는 앞 두 줄만 외웠고, 뒷소절이 궁금할 때마다 어머니 입을 쳐다보곤 했다.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사흘 걸음 밖에 있었다.
사흘 뒤 새벽이면 어머니가 짚신을 들고 문 앞에 올 것이다. 그때 말하면 한 번에 다 말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견성 보급이라는 말을 믿은 채 오늘 밤을 지낼 것이다. 진구는 손가락 마디를 꺾으려다가 멈췄다. 꺾을 마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구의 선택
III · 문에 걸린 신
출정 날 새벽, 진구는 해도 뜨기 전에 오 사람을 깨웠다. 평소보다 한 식경 이른 시각이었다. 덕만이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덕만“오장님, 오늘은 어째 서두르십니까. 어머님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소?”
진구“짚신은 필요 없다. 내가 사서 신었어. 줄 서.”
덕만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 더 보탰을 사람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그것이 진구에게는 더 이상하게 보였다. 오 사람은 어둠 속에서 창을 들고 줄을 섰다. 진구는 그 줄 맨 앞에 서서 문을 지나갔다. 목책 문 기둥에 짚신 한 짝이 못에 걸려 있었다. 새것이었다. 짚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문 너머 길 끝에서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오는데도 누구 목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침마다 부엌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던 그 소리와 같았다.
어머니“진구야! 진구야, 신 가져왔다!”
어머니가 걷는 소리가 아니라 뛰는 소리였다. 숨이 목에 걸려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덕만이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진구“앞 봐.”
덕만“오장님, 저기 어머님이…”
진구“앞 보라고 했다.”
진구는 걸음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어머니의 목소리가 뒤에서 멀어졌다. 열 걸음쯤에서 “진구야” 소리가 한 번 더 들렸고 서른 걸음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어머니 얼굴 말고 다른 것도 같이 보일 것 같았다.
덕만이 문 기둥에 걸린 신을 슬쩍 집으려 손을 뻗었다. 진구는 그 손목을 잡았다.
진구“놔둬.”
덕만“주인이 있는 건데…”
진구“그러니까 놔두라고.”
신은 새벽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십 리쯤 갔을 때 진구의 왼쪽 짚신 끈이 끊어졌다. 어머니가 삼아 놓은 새 신이 걸려 있던 자리가 눈앞에 선했다. 그는 길가 풀을 뜯어 끈을 대신 묶었다. 풀로 묶은 신은 걸을 때마다 발목을 스쳤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소금 행상에게 외사촌 앞으로 서한을 맡기고, 어머니께는 서주로 간다고 말한다. 행상의 걸음과 군이 도착하는 날 중 어느 쪽이 먼저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III · 서한
사흘 뒤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진구는 그날 저녁 외박 허락을 받아 동군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짚신을 삼던 손을 멈추고 아들 얼굴을 보았다. 불빛 아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서주 가는구나.”
진구“…예.”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짚 다발을 한 번 털었다.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진구는 어머니의 침묵을 곡식 가마를 지는 것처럼 견뎠다.
어머니“전보 형네는 동문 안쪽이다. 우물 두 개가 있는 집 뒤. 형은 글을 못 읽는다. 옆집 훈장한테 읽어 달라 해야 돼.”
진구“글은 짧게 쓰겠습니다. 성을 떠나라고요. 이유는 적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이유는 적어라. 안 적으면 안 믿는다. 형은 의심 많은 사람이야.”
진구“이유를 적으면 서한이 잡혔을 때…”
어머니“그럼 이유는 말고, 우리 노래를 적어라. 형은 그걸 알아본다. ‘솥을 걸자’ 말고 그 뒷줄. 나가라는 소리를 하는 노래다.”
진구는 붓을 잡다 멈췄다. 뒷줄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진구는 어머니 입을 보며 한 글자씩 받아 적었다.
그날 밤 장터에서 팽성으로 소금을 팔러 간다는 행상 한 사람을 구했다. 행상은 서한을 받아 품에 넣고 값을 불렀다. 진구는 가진 돈의 절반을 내밀었다.
행상“이게 뭐요. 편지 하나에 이렇게나?”
진구“동문 안쪽 우물 두 개 있는 집 뒤. 전보라는 사람. 직접 주십시오.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마시고요.”
행상“가면 읽어는 주는 거요? 그 사람, 글 모른다면서.”
진구“옆집 훈장한테 읽어 달라 하라고 하십시오.”
행상은 서한이 들어간 품을 한 번 두드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이 느렸다. 팽성까지 보름은 걸릴 듯한 걸음이었다. 진구는 군이 팽성에 닿는 날을 헤아려 보았다. 열흘이었다. 닷새 모자랐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구는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벽에 병영을 나선다. 문 기둥에는 새로 삼은 짚신 한 짝이 걸려 있고, 십 리도 못 가 신 끈이 끊어진다.
IV · 바퀴 한 짝
비는 사흘 만에 그쳤다. 조조는 막사에 앉아 구석에 기대어 놓은 바퀴 한 짝을 보고 있었다. 수레에서 떼어 온 것이었다.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살 사이에 풀 한 줄기가 박혀 있었다. 가솔 중에 살아서 돌아온 노복이 그걸 지고 왔다.
노복“주공, 소인은 수레 맨 뒤에서 짐을 끌었습니다. 앞에서 사람 소리가 났는데, 처음에는 또 비 때문에 수레가 멈췄나 했습니다.”
조조“그래. 그 뒤는.”
노복“나리께서… 덕 나리께서 먼저 내려가셨고요. 소인은 짐 밑으로 기어들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소인이 본 건 그게 전부입니다.”
조조“됐다. 하나만 묻자. 아버님 수레 휘장은 무슨 색이었나.”
노복은 대답이 막혔다. 왜 그걸 묻는지 몰라서 눈을 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노복“푸른색이었습니다. 한쪽 귀퉁이가 해졌고요.”
조조“푸른색이었군. 내가 지난봄에 새로 해 드리겠다고 했는데 아버님이 아깝다고 하셨지. 해진 데 기워서 쓰겠다고. 그래, 가 봐라. 밥 먹고 자거라.”
노복이 물러났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탁, 탁. 소리가 막사 안에서 유난히 크게 났다. 아버지의 시신은 비 때문에 닷새 뒤에야 닿는다고 했다. 조조는 아버지의 마지막 서신을 떠올렸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연주로 오겠다고, 길이 험하니 마중은 보내지 말라고 쓴 서신이었다. 마중을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보내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었다. 그 일을 곱씹을 시간은 군에 없었다. 군은 곱씹는 사이에도 밥을 먹었다.
막사 휘장이 걷혔다. 순욱이 들어서서 두 번 절하고 앉았다. 뒤따라 정욱이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순욱은 앉기 전에 막사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갑옷 한 벌이 걸려 있었는데 가슴판의 가죽 끈이 새로 갈려 있었다. 주인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손질한 흔적이었다.
조조“문약이 오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은 아니겠군. 중덕은 군량 얘기를 들고 왔고. 둘 다 밥값은 하는 사람들이야.”
정욱“주공이 웃으시니 소신이 더 무섭습니다.”
조조“웃어야 쓰지 않나. 울면 군이 어디로 가겠나.”
그 말을 하는 조조의 목소리가 끝에서 내려갔다. 순욱이 눈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조조는 효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그랬다. 목소리가 방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본인은 그걸 몰랐다.
V · 한 줄
서기가 올린 군령 초안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문장은 단정했다. 도겸의 죄를 묻고 장개의 목을 구하며 서주 땅으로 군을 낸다는 대목까지 조조의 뜻과 같았다. 마지막 줄만 달랐다. 서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덧붙인 듯한 필체였다. 서주에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남기지 말 것.
조조“이 줄은 누가 넣었나.”
정욱“소신이 아닙니다. 하후 장군 막하에서 온 말을 서기가 받아 적은 것 같습니다. 군의 원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조조“그래서 군이 어디까지 가겠다고 하던가.”
정욱“화와 비를 지나 팽성입니다. 군량은 한 달치입니다. 그 안에 끝내면 되고, 못 끝내면 서주가 군량이 됩니다.”
순욱이 무릎 위의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던 짓이었다.
순욱“주공, 소신이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서주 사람 모두가 장개는 아닙니다.”
조조“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나.”
순욱“아닙니다. 아시는 줄 압니다. 다만 군 아래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조조“하후 장군 막하라 했나. 그 말을 처음 한 사람 이름은.”
정욱“알아 두시면 벌을 내리셔야 하니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병사 하나가 한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올라온 것이라 합니다.”
조조“병사 하나라…”
조조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는 말이 어느새 자기 붓끝에 올라와 앉아 있었다. 촛불이 한 번 기울었다가 섰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말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조조는 붓을 들었다. 먹이 이미 갈려 있었다. 붓끝이 줄 위에 머물렀다. 막사 밖에서 말이 한 번 울고 병사들이 교대하는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누군가 기침을 했고 그 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조조“문약. 내 아버님은 평생 남의 땅을 떠돌다 가셨다. 나는 그분께 집 한 채를 못 사 드렸다. 이게 효냐.”
순욱“…주공.”
조조“대답하지 말게. 묻는 게 아니야. 중덕, 내가 이 줄을 두면 군은 몇 날 동안 움직이나.”
정욱“이 줄을 두면 병사들이 닷새 안에 팽성에 닿습니다. 지우면 보름은 걸립니다. 병사들이 노략을 못 하면 그만큼 군량을 더 먹으니까요.”
조조는 붓끝을 먹에 한 번 더 적셨다. 먹물이 붓에서 뚝 떨어져 군령 가장자리에 점을 찍었다. 순욱이 숨을 멈췄다. 정욱은 군량을 헤아리는 사람 특유의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조는 탁자를 두 번 쳤다. 탁, 탁. 그러고는 붓을 그 줄 위에 가져갔다.
조조의 선택
VI · 먹이 번진 자리
붓이 줄 위에 놓였다. 닿는 순간 먹이 종이에 번졌다. 글자 몇 개가 뭉개져서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조조는 그 위에 인장을 찍었다. 붉은 인주가 번진 먹 위로 올라앉았다.
순욱은 군령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뒷걸음질로 휘장 쪽으로 물러났다. 휘장이 흔들렸다.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오래 이어졌다.
조조“문약이 감기가 든 모양이군.”
정욱“추운 날씨입니다.”
조조“중덕. 이걸 내일 새벽까지 필사해서 각 진에 보내게. 백 부는 만들어야 해.”
정욱“백 부면 서기들이 밤을 새웁니다. 마지막 줄은 이대로 옮깁니까?”
조조“먹이 번진 대로 옮기라고 하게. 어차피 읽을 필요 없는 줄이야. 한 번 들으면 다 아는 줄이니까.”
정욱이 군령을 말아 쥐었다. 나가면서 한마디만 남겼다.
정욱“닭과 개가 없어지면 군량 계산이 쉬워집니다. 그게 소신이 드릴 말씀의 전부입니다.”
조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막사에서 구석의 바퀴를 한참 보았다. 풀 한 줄기는 아직 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잡아 빼 볼까 하다가 손을 거뒀다.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소리가 작았다.
새벽이 되기 전에 서기들이 필사를 마쳤다. 서기 하나가 졸다가 붓을 떨어뜨리자 정욱이 말없이 새 붓을 쥐여 주었다. 백 부의 종이가 말 등에 실려 진영마다 흩어졌다. 그 가운데 한 부가 견성 서쪽 병영에 닿을 것이었다. 거기서 오장 하나가 밥을 짓다 말고 그걸 받아 읽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그 줄을 지운다. 지운 자리에 글자가 희미하게 비쳐 보이고, 경비병 하나가 대장이 약해졌다고 수군거린다.
VI · 지워진 줄
조조는 줄 위에 붓을 그었다. 가로로 한 번, 한 번 더. 글자가 먹 밑으로 가라앉았다. 지운 뒤에도 읽으려면 읽을 수 있을 만큼 얇은 줄이었다. 서기가 숨을 멈췄다.
순욱의 어깨가 처음으로 풀렸다. 정욱은 풀리지 않았다.
정욱“주공, 이렇게 하시면 군이 어찌 듣겠습니까. 병사들은 사흘 굶고도 효를 위해 간다는 말에 걷는 사람들입니다. 효를 위해 간다더니 막상 얻는 게 없으면 아무도 안 걷습니다.”
조조“얻는 게 없다니, 장개 목이 있잖은가.”
정욱“그건 한 사람 몫입니다. 한 사람 목으로 군 전체가 먹지 못합니다.”
조조“칼을 안 댄 땅은 이긴 뒤에 내 땅이 되네. 중덕, 다스릴 땅이 필요해서 하는 소리야.”
정욱“…그럼 그렇게 군령에 쓰시지요. 병사들은 그걸 이해하기 전에 먼저 굶습니다.”
순욱“문서에 쓰는 것과 병사들이 듣는 것은 다릅니다. 소신이 군 안에서 말을 돌려 보겠습니다.”
조조“그래 주게, 문약. 말은 자네가 제일 잘 돌리니까.”
조조는 웃으려다가 말았다. 정욱은 군령을 말아 쥐고 나갔고, 순욱은 절을 하고 뒤따랐다. 막사에 혼자 남은 조조는 지운 줄을 한참 내려다봤다. 줄 아래 글자가 비쳐 보였다. 닭, 개. 그는 그 두 글자를 손끝으로 눌러 봤다. 종이가 얇아서 손가락에 먹이 묻어났다.
막사 밖에서 경비병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휘장 사이로 넘어왔다. 숨죽이려는 목소리가 오히려 또렷했다.
경비병“줄 하나 지웠다더라. 마지막 줄을.”
다른 경비병“무슨 줄인데?”
경비병“몰라, 서기가 그러는데 닭하고 개 어쩌고 하는 거였대. 아무튼 대장이 약해졌다는 소문이 벌써 돈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소리가 막사 밖까지 넘어갔는지 경비병들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먹 묻은 손가락을 소매에 닦았다. 소매에 검은 자국이 남았다. 오늘 하루는 그 자국을 가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조는 그 줄을 지우지 않는다. 먹이 번진 군령 백 부가 그대로 나가고, 순욱은 문밖에서 말없이 기침만 한다.
VII · 도겸의 편지
평원성 관아 마당에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유비는 한 장짜리 서찰을 두 손으로 쥐고 서 있었다. 종이가 얇아서 눈 위로 햇빛이 비치면 뒷면의 글씨가 비쳐 보였다. 편지는 짧았다.
서주목 도겸, 평원상 현덕께 고합니다. 조조의 군이 서주에 듭니다. 팽성이 곧 닿습니다. 구원을 청합니다. 병이 부족하면 단양에서 온 병 사천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장비“사천이라면 큰 거 아닙니까, 형님. 도겸 영감이 이 꼴이면 지금 사정이 어지간히 급한 겁니다.”
유비“익덕아, 소리가 크다. 사자가 듣는다.”
장비“듣거나 말거나 우리가 가야죠. 가면 사천이오.”
관우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서쪽을 보고 있었다. 서주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유비는 그걸 알았다. 관우가 말없이 서쪽을 볼 때는 어디서 사람이 오고 있을 때였다.
유비“운장, 어찌 보는가.”
관우“형님의 판단이 곧 제 판단입니다.”
유비“그 말은 아무 말도 안 한 것과 같은데.”
관우“…가면 평원이 빕니다. 공손 장군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손찬이 보낸 사자는 마당 한쪽에서 두 손을 소매에 넣고 서 있었다. 사자는 눈치를 봤지만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이 오는 날에도 땀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소매 끝으로 이마를 닦았다. 녹은 눈이 그의 턱 끝에서 한 방울 떨어졌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사자“공손 장군께서는 평원상이 알아서 하시라 하셨습니다. 다만 군을 빼시려거든 아랫사람 이름을 모두 적어 올리라 하셨습니다. 누가 가고 누가 남는지요.”
유비“이름을 적어 올리라…”
유비는 그 말을 입속으로 되풀이했다. 이름을 적어 올리라는 말이 병을 적어 올리라는 말보다 먼저 귀에 걸렸다. 병은 몇 천이면 숫자이지만 이름은 한 사람마다 얼굴이 있었다. 평원성 문지기의 이름은 대성이었다. 그 옆자리는 말이 없는 아이로 이름은 재진이었다. 유비는 그들 이름을 한 번씩 입속으로 불렀다.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녹아 떨어졌다. 한 방울이 눈에 박히는 소리가 마당 가득 들릴 만큼 사방이 조용했다. 장비는 입을 열려다가 관우의 눈빛에 걸려 도로 닫았다. 사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유비“사자 어른. 오늘 밤 하루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내일 아침 답하겠습니다.”
사자는 허리를 숙였다. 눈이 그의 어깨 위로 쌓였다.
VIII · 짚신
밤이 되자 관아 뒤채에 불이 들어왔다. 유비는 화로 곁에 앉아 짚 한 다발을 풀어 헤쳤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릴 적 탁현 시장에서 돗자리와 짚신을 짜서 팔던 손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생각이 복잡해지면 짚을 잡았다. 끈을 꼬고 신코를 만들고 바닥을 엮었다.
장비는 방 한쪽에서 코를 골았고 관우는 문 옆에 앉아 칼을 닦았다. 유비는 신 한 짝을 다 엮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유비“운장. 사천이라는 병은 어디서 올까.”
관우“단양입니다. 도겸의 사람들이 아닌 병입니다.”
유비“도겸이 그걸 내게 내준다는 건, 이 일이 끝나도 내가 그에게 빚졌다는 소리지.”
관우“예.”
유비“빚이 나쁜 건 아니다. 빚은 잊지 않게 해 주니까. 그런데 내가 제때 못 가서 팽성이 무너지면, 그건 빚이 아니라 짐이 되겠지.”
관우“…”
유비“아니야, 말을 하다 보니 그렇다는 거야. 접어 두게.”
관우는 칼을 닦던 손을 멈추었다. 칼날에 화로 불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관우“형님.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 가면 공손 장군 눈 밖에 나고, 늦게 가면 도겸 눈 밖에 납니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유비는 웃었다. 짚신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끈을 꼬다 말고 한동안 손이 멈췄다. 방 한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뚝 끊겼다. 장비가 눈을 반쯤 뜬 채 몸을 일으켰다.
장비“형님, 아직도 신 삼고 계십니까. 서주는 내일이라도 불이 날 판인데.”
유비“불이 나는 판이니 신이 필요하지. 걸어서 가든 뛰어서 가든 발은 하나뿐이니까.”
장비“그 말씀은 가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유비“아직 모르겠다. 자네는 자게.”
장비는 투덜거리며 도로 누웠다. 얼마 안 가 다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유비는 그 소리를 듣고 조금 안심했다. 이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잠은 잔다.
유비“글쎄, 둘 다 무겁네. 그래서 이러고 앉아서 신이나 삼는 거 아닌가.”
관우“…농담이십니까.”
유비“반쯤은.”
아침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세 시진이 남아 있었다. 유비는 신을 내려놓고 서찰을 다시 펼쳤다. 서찰 끝의 사천이라는 글자 위로 불빛이 얼룩졌다. 그는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문밖에서는 눈 쌓인 마당을 가로지르는 야경꾼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한 걸음마다 눈이 뽀드득 울었다. 유비는 그 소리를 세다가 열에서 그만두었다.
유비의 선택
IX · 새벽 성문
새벽 인시에 평원성 문이 열렸다. 눈은 그쳤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중이었다. 유비는 성문 앞 말 위에서 군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앞서 나가는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모두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장비“형님, 이렇게 빨리 정하실 줄 몰랐습니다. 어젯밤은 영 안 가시는 줄 알았소.”
유비“가기로 정한 건 어제 낮이다, 익덕아. 어젯밤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만 생각했어.”
장비“그게 그거 아닙니까.”
유비“다르다. 무슨 신을 신고 가느냐가 다르지.”
장비는 알아듣지 못해 투덜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해의 군이 같은 길로 나란히 나서고 있었다. 숫자로는 사천이 조금 넘었다. 눈 위를 걷는 짚신 소리가 한꺼번에 사각사각 났다. 그 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는 묻혔다.
성문을 지나다가 유비는 말을 세웠다. 문지기가 창을 세우고 서 있었다.
유비“대성이.”
대성“예, 상공.”
유비“오늘은 평원이 빈다. 자네가 문을 맡아 주게. 열쇠를 잘 쥐고 있게나.”
대성“…예. 맡겠습니다.”
대성의 눈이 커졌다. 평원상이 문지기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비는 말에 박차를 가하고 성문을 지났다. 성벽 위에서 노인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비도 손을 들어 보였다.
반나절을 걸어 어느 언덕에 올랐을 때 맞은편 길로 짐을 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솥을 진 아낙, 아이를 업은 노인, 소 한 마리를 끌고 가는 사내였다. 관우가 말을 가까이 붙이고 낮게 말했다.
관우“형님.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입니다.”
유비“알고 있다.”
그들은 군이 지나가는 동안 길가에 비켜 서서 눈을 내리깔았다. 유비는 그 사람들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앞서가는 병사들의 짚신 끈을 하나하나 보았다. 풀린 것이 있으면 이름을 불러 매게 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하룻밤을 더 머문다. 파발이 달려와 팽성이 어젯밤 무너졌다고 전하는데, 불을 살리러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IX · 하룻밤 더
유비는 군을 냈다. 다만 새벽이 아니라 해가 중천에 오른 뒤였다. 전해의 군이 먼저 앞서 나갔고, 유비는 그 뒤를 따랐다. 진군은 하루 이십 리를 넘지 않았다. 해가 지기도 전에 병영을 쳤다.
장비“형님, 아직 해가 남았습니다. 한 시진은 더 갑니다.”
유비“익덕아. 병사들 신 좀 봐라. 오늘 눈길이었다. 쉬어야 내일 걷는다.”
장비“도겸 영감은 지금도 죽어 가는데요.”
유비“그래서 하루만 더 본다. 전해가 먼저 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 뒤에 가야 한다.”
장비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숨소리가 거칠었다. 관우가 불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병사들은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국을 마시고 있었다. 소리 없이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비는 불에서 떨어져 병영 가장자리에 섰다. 남쪽 하늘이 어두웠다. 그는 하룻밤이 길다고 생각했다. 하룻밤이라는 말이 이렇게 길었던 적이 없었다. 짚신을 삼는 손이 허전해서 소매를 쥐었다 폈다.
새벽 인시가 되기 전에 길 위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 필이었다. 병영 보초가 창을 세우고 외쳤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린 사람은 도겸 쪽 파발이었다. 입술이 터져 있었고 신발에는 진흙이 허벅지까지 묻어 있었다.
파발“평원상께 아룁니다. 팽성이 어젯밤 무너졌습니다.”
유비“…어젯밤.”
파발“성이 아니라… 사람이, 사수 가에서… 소인은 더 보지 못했습니다. 말을 타고 도망 나왔습니다.”
관우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장비는 입을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유비는 파발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파발의 어깨뼈가 손에 닿았다. 가볍고 떨렸다.
유비“이름이 뭔가.”
파발“…예?”
유비“이름 말이네. 자네 이름.”
파발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고삐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파발“소인은 이름이… 서문입니다.”
유비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되풀이했다. 하루 늦었다는 말은 병영 안의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닥불이 꺼져 가고 있었고 아무도 불을 살리러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비는 새벽에 성문을 나선다. 문지기 이름을 불러 인사하고, 길가에는 피난민 행렬이 이어진다.
사흘 뒤 새벽에 병영 문이 열리고, 군령 백 부가 말 등에 실려 나갔고, 평원성 마당에는 눈이 쌓였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세 사람이 같은 강의 위쪽에서 같은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사수는 아직 흐르고 있었다.
네 선택이 연 2장 루트
2장은 준비 중입니다. 지금 읽은 선택은 이 기기에 기억됩니다.